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문단 편집) === 1983년 7월 1일 ~ 7월 10일: 긴급 편성 릴레이 생방송 === * 1일째 : 1983년 7월 1일 새벽. 날이 채 밝기도 전부터 '''1만여 명'''의 이산가족들이 KBS 본관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전날 미처 방송되지 못한 이산가족들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송국으로 달려온 이산가족들로 방송국에 등록하고자 [[여의도]]를 찾았다. 이에 본관 공개홀(스튜디오)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프로그램 출연 및 이산가족 문의전화로 방송국의 전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자, KBS의 편성책임자는 다음 날인 금요일 밤에도 기존 정규편성을 취소하고 연속생방송을 하루 더 연장했다. 전날보다 회선을 5대 더 늘려 총 15대의 전화를 놓았으나 물론 이 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진행자로는 전날 밤 철야를 해 가며 방송했던 유철종, 이지연, 손석기, 황인우, 유애리 중계조가 이날 밤에도 계속해서 방송을 진행해 나갔다. 또한 사랑방 중계(1983~1993)를 진행하던 [[원종배]] 아나운서가 유애리 아나운서와 함께 KBS본관 중앙홀 쪽에 추가로 투입되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공개홀 제1스튜디오가 비좁아지자 KBS 본관 한 가운데에 있는 중앙홀[* 현재도 남아 있는 어정쩡한 공간. 원래는 [[일본방송협회|NHK 요요기센터]]를 건립하고 운영한 노하우를 가진 기술진들이 이를 더욱 발전시킨 설계를 적용하여 입체대도구가 한 번에 이동 가능한 6개의 스튜디오가 리볼버식으로 지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윗사람들의 입김 탓인지 실무자들이 유럽에 견학하러 간 사이에 설계가 변경되어버렸고, 현재도 이곳은 로비도 아니고 홀도 아닌 어정쩡한 높이와 넓이를 지닌 공간이라서 카페 몇 개와 라디오 오픈 스튜디오가 들어와 있다. 어차피 지금은 신관 뒤에 제대로 된 무대공간인 KBS홀이 생기면서 크게 의미가 없어졌다.]에 좌석을 마련하고 여의도 내에서도 이원중계를 시작했다. 특히 이날 밤에 방송을 보면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직장에 지각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고 한다. * 2일차: 흥행대박을 직감한 KBS가 간판 에이스 아나운서들을 모두 투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철종 MC, 이지연 아나운서가 이틀 밤을 꼬박 지새우며 토요일 아침까지 방송을 하고 나자, 현실적으로 더 이상 진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40분간 뉴스 및 다른 프로그램이 잠시 나간 후 교대 진행자인 김동건, 신은경 아나운서가 투입되었다. 그리고 이날은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종일편성[* 당시는 24시간 방송을 하지 않았고, 평일에는 아침 5시 30분~10시, 저녁 5시 30분~자정 전후까지 방송했고, 토요일에는 아침5시 30분~10시까지 방송한 후 3시간 정도 쉬다가 다시 낮1시부터 시작, 자정 전후까지 방송했다. 아침방송과 저녁방송의 중간에는 정파 시간이라고 하여 TV를 틀면 [[우주배경복사|치직거리는 소음]] 외에 아무 것도 나오지 않거나, 혹은 컬러바 송출만 이루어질 뿐이었다. (이후 90년대 중후반부터는 '오늘 오후의 방송순서'라는 자막과 함께 오후에 방송할 프로그램과 배경으로 한강 풍경 등이 나오기도 했다.) 종일방송 포맷은 일요일과 공휴일, 그리고 특별 실황중계(재난방송 등) 시에만 사용되었다. 물론 전두환의 해외순방 귀국 환영식 같은 건 짤 없이 [[땡전뉴스|전파 낭비해 가며 중계해 줬다]].]이 가능했는데, KBS는 '''10분짜리 정오뉴스를 제외한 모든 정규프로 편성을 취소하고''' 이산가족 생방송을 계속해 나갔다. 지금처럼 [[주 5일 근무 제도|주5일제]]는 아니었으나 [[토요일]]은 '반(半) 공일(空日)'이라고 하여 [[주 6일 근무 제도|오전 근무 및 오전 수업]][* [[놀토]]문화가 정착된 건 이로부터 22년이 지난 2005년부터이다.]만 했기 때문에 이날 시청률은 문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이런 현상은 프로그램 기획하는 입장에서는 대단한 [[특종]]인 것이었다. 당시 방송기록을 쭉 보면 큐시트가 있는 TV쇼 포맷은 이미 방송 1일차에 그 의미를 잃어버렸고 사실상 [[방송사고]]의 연속중계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혹시나 자기 혈육이 나올까봐 TV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이산가족이 아닌 사람들도 방송을 보고 있으면 예측하지 못하는 때에 갑자기 여기서 박수소리가 터지고 저기서 얼싸안고 우는 감동의 드라마가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33년이나 묵은 한 맺힌 인간드라마에는 최소한의 큐시트도 필요 없었다. 실제로 이날 방송은 전체 방송기간을 통틀어 가장 혼란스러웠다. 당시 방송을 보면 PD들의 고성과 온갖 현장잡음이 오디오에 섞여드는데 혼돈 그 자체였다. 7월 2일과 3일은 주말이었기 때문에 평일에 비해 많은 시청자들이 TV 앞을 지켜봤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의 방송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식사도 잠도 거른 채 KBS 앞에서 노숙하다시피 했고 진행자와 제작진들도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김밥]]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며 방송을 진행했다. 2, 3일차는 중간 뉴스시간 총합 1시간 정도만 제외하면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저녁 7시 30분까지, 거의 21시간을 연속 방송한 셈이었다 . 이 때문에 방송국으로 나와서 이틀 밤낮을 지새운 이산가족들이 체력적으로 힘들어하자 부산에서는 서대신동에 사는 어느 시민이 초량동 KBS 부산방송국까지 밤중에 12키로를 달려와서 박카스 500병을 사다 돌리기도 했다. * 3일차: 아래 외교부 공개 문서에서도 보듯,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는 이 호재를 당연히(?) 활용하고자 했는데, 그러다보니 첫 날 방송과 다르게 이날부터 오프닝과 엔딩 멘트에 다분히 북한을 압박하는 지금 보면 상당히 아스트랄함을 느낄 수 있는 내용들이 들어간다.[* 정확히는 3일차 클로징부터였다.] 또한 이날부터는 [[직업군인]] 출연자도 두어 명씩 등장하는데, 국방부를 통해 군부대에도 출연자를 찾으라는 협조공문이 전파된 것으로 추측된다. 지방방송국으로 달려온 부사관이 두세 명 출연하고 있으며 한 사람은 전라남도가 위수지역인 모 사단 상사이고 다른 사람은 전방에서 달려온 부사관이다. 깡통모자 전투모에 칼 각이 잡혀있고 가족들을 끌어안고 엉엉 우는 와중에도 반드시 '전두환 대통령 각하'와 기회를 준 [[연대장]]과 [[사단장]]에게 감사하다고 경례까지 하면서 언급하는 것은 덤이었다. 이 문서 맨 위에 걸려 있는 만세 부르는 오누이도 이날 오후에 출연했다. 하단 항목 참조. * 4일차: [youtube(6YpmAaBD5lE)] 방송이 본 궤도에 오른 7월 4일 오전 9시,[* 방송당일은 공교롭게도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된지 11년이 된 날이다.] 방송의 오프닝+멘트+초반부 1시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다. 오프닝은 4일차까지 상봉했던 가족들 중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장면들만 모아놓았다.[* 문서 최상단 사진 속의 오누이 상봉 장면도 나온다.] 오프닝 타이틀곡은 곽순옥의 노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상시편성 이후에는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으로 교체된다. 자세한 사항은 후술하는 [[#삽입곡|삽입곡]] 항목 참조. 이날 방송은 방송 직후의 아수라장[* 유철종 MC가 훗날 실제로 이렇게 회고했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KBS 본사와 각 지역방송국 간의 합이 맞춰지기 시작한 시점이라 이전보다는 진행이 매끄러워졌다. 전날인 일요일 낮방송은 시청률 '''78%'''를 찍은 상태였기 때문에 [[높으신 분들]]부터 시작해서 전국의 모든 이목이 KBS1로 쏟아진 것이다. 3~4일 정도 방송을 진행하고 나자 어느 정도 가락이 붙은(?) [[한국방송공사/전국 방송망|지방방송국]] 아나운서와 제작진들이 자기 지역 국 공개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내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 지역 국의 몇 번 출연자가 우리 지역의 ○○○ 씨를 찾는다고 했는데, 준비해 주시는 동안 몇 분이라도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라는 식. 그리고 이날부터 서울 부조에 있는 PD가 사정없이 잘라버린다. * 5일차: 미처 소개하지 못한 8000번대(서울)부터 전날에 이어 계속 방송했다. 심지어 방송을 종료하기 위한 멘트를 하다가 말고 지역 방송국을 연결해 한 가족이 더 만나기도 했다. 이날 클로징부터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 삽입곡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날부터 오프닝과 엔딩 멘트를 진행자들이 반드시 원고 종이를 손에 들고서 읽으면서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방송작가가 써 주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진행자의 멘트에서 언급됐듯이, 방송 4~5일차 즈음이 마침 [[7.4 남북 공동 성명]] 11주년이 되는 때였다. 때가 때이니 7.4 남북공동성명을 구실삼아 대북 비난 멘트를 날릴 수 있었다.] 사실 이전에도 흥분한 출연자들 중 일부가 "[[김일성]]이 이 [[개새끼|XXX]]야, 니가 [[남북분단|민족의 아픔]]을 아느냐?", "저 나쁜 공산당 놈들 때문에 우리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느냐?"하며 욕설을 하는 장면이 [[생방송]]을 탄 적이 몇 번 있지만, 아무래도 이건 울분에 찬 이산가족들의 넋두리에 가까웠다. 이산가족들의 빗발친 요구로 그간 녹화된 테이프를 KBS 여의도 본사 중앙홀과 각 지역방송국 로비에서 VHS로 재방영했다고 한다. '''인터넷 VOD 재방송은커녕 지역 공청 채널도 없던 시절이다.'''[* 현장 VHS 재방영조차도 방송국 내부 인파 조절에 한계가 있어서 [[KBS 2TV]] 중앙/지역중계시스템을 통해 낮/심야 정파시간만 했다. 한동안 [[KBS 2TV]]의 낮/심야정파를 중단하고 {재방송}자막을 상단에 고정하여 녹화분을 재방송하였다. 물론 공청이라고 하는 중계유선방송있긴 했지만 별로 없었는걸 감안해야 한다.] 또한 [[KBS 제1라디오]](HLKA)는 TV와 별도로 이산가족 방송을 진행해서 70여 가족이 더 상봉할 수 있었다. * 6일차: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이 타이틀과 삽입곡으로 들어오고, 방송 앞뒤로 80년대식 지금 보면 손발이 좀 오그라드는 내레이션이 붙기 시작했다. 이 방송을 계기로 군부 독재 체제라는 암울한 현실속에서 북괴를 처단하고자 하는 흑색 선전이 대폭 강화되면서, 정부[* [[대한적십자사]] 총재[* 당시 총재인 [[유창순]] 그 자신도 평안남도 안주시 출신의 실향민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높으신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공개홀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라든가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이라든가 하는 [[높으신 분들]]이 출연하기도 했다.]차원 에서도 이산가족 찾기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날부터는 KBS 제1TV와 제1라디오에서 동시 생방송을 시작했다. '''"[[단파수신기|단파라디오]]를 통해 중공에서도, 쏘련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국내에서는 1993년까지 HAM이나 기자, 안기부요원이 아니면 소지가 불가능 했으며 KBS1R은 2007년까지 SW로 송출했다.]'라는 깨알 같은 멘트가 인상적이다.[* 북한에서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방송 내 아나운서들의 멘트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간간이 김일성 욕이나 인민군에 납치되었다는 사연 등 북측에 불리한 샤우팅이 튀어나오고, 애초에 북한은 지금까지도 모든 [[대북방송]]을 상대로 [[방해전파]]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6일차 방송 종료 후, 1라디오에서 오전 10시 부터 밤 9시까지 추가 방송을 실시하였다. * 7일차: 7일차 이후에는 체제 선전에 도움이 되는 [[스테레오타입]]의 상봉(6.25 때 헤어져서 갖은 고생 끝에 혈육의 정을 나누는 상봉)은 '''생방송 화면 위에 오버레이로 전쟁 기록영화 장면을 씌우고 슬픈 BGM을 깔아주는 등''' 적극적으로 띄우려고 노력했고, 같은 이산가족이라도 전쟁 후의 생활고로 헤어졌다든가 단순 가출 사례 등은 상봉 장면이라도 대충 사실여부 및 전화번호를 묻는 식의 구색만 맞추고 냉정하게 잘랐다. 방송 진행이 안정적이 되면서 눈물바다 대신 되레 왜 안 찾았냐고 역정부터 내거나, 서로 가는귀가 먹어 본의 아니게 만담을 하는 출연자들도 있고, 이를 보고서 방청객들이 박장대소를 하는 장면도 간간이 나온다. 진정한 의미의 휴먼 드라마. 또한 정부에서 이산가족 찾기를 [[새마을 운동]]과 같은 범국민적 운동으로 추진키로 하는 결의안이 정식으로 통과됨에 따라, 기존의 KBS에 접수했던 사람들은 모두 새로 접수를 해야 했다. 접수는 각 행정단위(시, 군, 구청) 민원실과 경찰서, 여의도 KBS 본사에서 받았으며, 이들 신규접수 명단은 모두 책으로 인쇄되어 시, 군, 구청 민원실과 KBS 옆 만남의 광장[* 여의도광장이 복잡해지니 현재의 [[KDB산업은행]] 부지에 아예 '만남의 광장'을 따로 마련했다.]에서 본인과 관계자가 열람할 수 있었다. * 8일차 : 어젯 밤 부터 아침 시간 중계를 유철종, 이지연 MC가 진행하고 뉴스와 드라마가 나간 후 익일 아침 9시부터 김동건, 신은경 조가 다음 날 낮 시간대를 진행했다.[* 일요일 낮 시간대가 비는 것은 [[전국노래자랑]] 때문. 어찌 보면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도 잘라버리는 시청률 끝판 왕 국민 예능 전국노래자랑의 위엄. 참고로 이때는 [[송해]]가 사회 보기 전이다. 송해가 전국노래자랑 MC를 맡기 시작한 건 1988년부터였다.] 특히 이 날은 [[로스앤젤레스]]와 서울 KBS 본사를 위성으로 연결[* 미국 [[ABC(미국)|ABC]] 방송국에서 지원해줬다. 아래 방송기술 항목에도 써 있지만 위성중계 이전에 KBS의 기술력으로는 자체 삼원방송이 불가능했다.]해서 상봉을 시도했고, 결과적으로 이날 위성중계를 통해서도 세 가족이 만났다. 한국에 있는 딸이 미국에 있는 엄마를 모니터 화면으로 보면서 "엄마 얼굴 한 번만 만져보자."하며 통곡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https://youtu.be/nsJd4Tc7VOM|방송분. 상봉 장면은 48분 16초부터]] 이 상봉 장면은 이후 영화 [[국제시장(영화)|국제시장]]에서 오마주된다. 또한 방송 말미에 윤덕수 정치부 기자가 한 번 더 등장하는데 바로 [[전두환]] 대통령이 이날 오후 예고 없이 KBS를 방문했기 때문.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z1Ll8o940AA)]}}} || ||KBS를 찾아 제작진을 격려하고 [[이산가족]]들을 위로하는 전두환의 모습을 담은 1983년 7월 15일자 [[대한뉴스]] || 동시대 뉴스를 보면 전두환이 예고없이 군부대, 관공서, 지자체를 깜짝 방문했다는 뉴스가 유달리 자주 나온다. 국가원수 특유의 숟가락 얻기용이기도 하지만(1명이라도 더 찾을 수 있도록 지시했다는 자신의 행동을 홍보) 그만큼 전국적인 관심이 모아졌다고 볼 수 있다. 이후로 메인MC 유철종-이지연, 교대MC 김동건-신은경 체제가 확립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